본문 바로가기

Chinggis Khaan Power Trips/2012 유럽횡단여행+중국

용감한 단독 유럽횡단여행기(폴란드 크라쿠프 편 2)

 

 

 

 

 부제: Rest in Peace!!(고이 잠드소서!)

 

 알람소리를 듣고 깨어보니 핸드폰 시계는 약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간단하게 씻고 아침식사는 커피한잔과 빵 몇개를 섭취했다. 웬 일본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일본인이 내가 첨엔 일본인인줄 알았을테고 ㅋㅋ
 비록 나는 일제시대의 피해자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일본인이라는 족속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아직도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똥싸는 소리를 하고다니기 때문에. 그런데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렸다, 그에게 반갑게 반색을 한 뒤에 서로 소소한 일상을 공유했다.
 
 식사를 마친 뒤, 씻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떠날 채비를 했다. 3년 전에 갔었던 곳이기에 가는 길에 대해 상세히 알아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짐을 챙기고 중앙역으로 가기 전에 매점에 들려서 AAA사이즈 건전지와 스닉커어즈바, 그리고 생수 한병을 구입했다.(AAA건전지는 MP3플레이어 가동목적으로 필요했다.)
 중앙역에 도착한 순간, 긴장을 좀 태웠다. 영어는 필요할 때 빼곤 오로지 한국어로만 일관하기로 했다. 3년 전에 크라쿠프 중앙역에서 악몽이 있었기에.
 
 3년 전에 아우슈비츠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웬 독일인이 내게 친한 척을 하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이 관광하자고 제안하다가 갑자기 화제를 바꿔서 자기 현금카드 마그네틱에 이상이 생겨서 돈을 인출 못하니 1,000zlt 정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약 300zlt정도 빌려주면서 베를린에서 만나자고 했었는데 이상하게도 첨에 아우슈비츠 같이가자고 제안했던 그는 나를 버스에 타게 하더니 혼자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졌다. 결과는 뻔할 뻔자, 그다음날 나는 급히 소금광산 일정을 취소하고 베를린행 열차에 올라타서 다음날 아침 일찍 베를린 중앙역으로 나왔지만 그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하기만 할 내가 아니지, 즉시 베를린에 주재한 한국영사관으로 찾아가서 그의 개인신상정보를 넘겼고 주 폴란드 한국 대사관에도 연락취하여 그의 개인신상정보를 넘겼다. 그가 훗날 경찰에게 잡혀서 처벌받기를 기대하면서...
 예상대로 모르는 사람들 및 삐끼들이 내게 접근해왔다. 아예 영어를 모르는 척 하고 한국어로만 말을 했더니 쉽게 떨어져 나가더이다 ㅎㅎㅎㅎㅎㅎㅎ 그런데 문제는 버스정류장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3년 전처럼 아우슈비치 관광 제대로 못할지도 몰라서 하는 수 없이 기차타고 아우슈비츠로 가기로 했다. 크라쿠프에서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까지의 요금은 편도로 10zlt, 그리고 소요시간은 90분이라 명시되있었다.(수원-대전간 거리와 맞먹는군 ㅋ)

 

 

 

 


 

 

 얼마나 달렸을까, 기차에 어떤 술에 취한 아저씨가 내게 아는 척을 해오더니 나와 마주본 쪽에 앉았다. 나이는 대략 50대 중반대로 보였는데 그 아저씨는 영어를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아저씨는 내게 알 수 없는 폴란드어로 뭐라뭐라 그러다가 심지어는 내가 듣고 있던 음악 같이 듣자고도 해봤다.(허헐~ 담 좋은데~?ㅋㅋㅋ) 나는 나대로 러시아어로 장단 맞춰주는 척 하고(뭐 같은 슬라브 계통의 언어이니 어느정도 알아먹겠지?ㅋㅋ) 이내 그 아저씨는 이번엔 다른 좌석에 앉아 있는 20대 금발의 여성에게 추근덕거리러 갔다.
 오슈비엥침 역까지 불과 두세정거장 정도 남았을 때, 그 아저씨는 내게 행운을 빌더니 하차했다. 이거참 골때리는 사람일세~ㅋㅋ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소지품들을 살펴봤는데 다행히도 없어진 물건은 없었다. 하긴, 맨 정신이 아니었는데 물건을 빠삭하게 훔칠 리가 없지 ㅋ
 "저 아저씨 완전 정신나간 사람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예, 제가 봤을때도 완전 미친사람이네요"
 "그런데 댁도 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시나요?"
 "아뇨, 저는 집에가는 길이에요"
 "아, 오슈비엥침에 사시는군요"

 

 얼마 뒤, 기차는 오슈비엥침 역에 도착했다. 그 여성과 나는 서로 행운을 빌고 나는 역에서 바로 내려서 건너편으로 갔는데 이번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길을 모르고 있었다. 마침 바로 앞 가게에서 한 50대의 인부가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실례지만 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길 알고 계세요?"
 "자네 러시아어로 말하고 있군, 러시아어로 알려줄까?"
 "네 상관없어요"
 "네 뒷방향으로 쭉 걷다보면 갈림길이 나올거야, 그리고 왼쪽으로 꺾어서 쭉 가면되"
 "직진,왼쪽,직진이요?"
 "그래"
 "아, 감사합니다, 그럼 좋은하루되세요!^^"
 "그래, 너도"

 그 인부가 일러준대로 걷고 또 걸었다. 한 30분정도 걸어서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겨우 도착했다. 기차편은 교통이 꽤나 불편하군, 킁!

 

 아우슈비츠 입구에 들어서서 한국어 가이드북을 사고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내게 손짓을 했다. 알고보니 이틀 전 브라티슬라바에서 같은 기차칸에 있었던 그 키다리 부부였다. 그 키다리 부부는 이미 아우슈비츠를 다 보고 왔다고 한다. 다시 재회한 기념으로 그들과 사진촬영하고 내 이메일 주소와 페이스북 주소를 남기고 그들에게 행운을 빌며 또 만날 수 있기를 빌었다.

 

 아우슈비츠 입구에는 오디오가이드도 대여하고 있었는데 아우슈비츠는 투어돌 것도 없이 단독으로 행동하기로 했다. 건물을 나오니 그 아우슈비츠 정문은 이날도 변함없이 아우슈비츠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햇볕이 쨍쨍하고 푸르른 나무가 무성한 배경의 아우슈비츠는 3년 전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그땐 눈으로 덮혀있어서 우울했고 암울했는데....

 

 

 

"일해라, 그러면 자유로워질찌어다!"

 

 

 

 한국어판 가이드북에 나온 내용대로 첫번째 집을 찾아가서 들어갔다. 들어가보니 한 팀의 투어리스트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하고 있었다. 수감자들이 썼던 소지품들, 그리고 수감자들을 대량학살하는데 쓰였던 약품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자 수감자들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카펫 

 

수감자들이 썼던 소지품들(구두약,신발, 등등) 

 

수감자들을 대량학살하는데 쓰인 약품

 

머리통이 박살난 인형은 3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첫번째 건물 관람을 다 마치고 가이드북에 제시된 순서대로 건물을 돌면서 관람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헷갈릴 때는 단체로 움직이는 투어리스트들을 따라다녔다.

 

 

 

 

아우슈비츠 경계근무초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갔던 수감자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수감자들이 입었던 옷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구출됐을 때의 소년 수감자들.

 

 

수감자들이 지냈던 침실

 

 

 

 3년전에 들은 내용과 가이드북에 나와있는 내용, 그리고 첨부된 사진을 간략하게 복합정리하자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엔 많은 수감자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곳에 한 번 수감되면 탈출하기가 힘들었고 일할 능력이 없는 자들은 가스실로 끌려가서 대량학살 당했다고 한다. 그들이 입었던 옷은 재질이 너무 얇았고 그 얇은 옷 차림으로 혹한의 한겨울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아우슈비츠가 외부에 개방될 당시, 그곳에서 구출됐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동착취 당하고 굶고 또 굶어서 뼈밖에 없는 영양실조상태였다. 그들이 지낸 침실은 마굿간을 개조하여 만들어진지라 위생상태가 완전 최악이었다고 한다. 전시된 물품 및 사진을 하나하나 볼 때 마다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전시관을 순서대로 돌다보니 어느 새 사형집행장까지 오게됐다. 총살대는 이날도 말없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지키고 있었고 몇몇 방문객들은 그 총살대 앞에 헌화를 했다. 나는 조용히 총살대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감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했다.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한건 꽤 오랜만이었다. 안그래도 기독교에 대해 서서히 반감이 가고 있었던 데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그동안 나를 죄이고 억압했던 종교, 그 거슬리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싶었는데... 억울하게 죽어간 고인들 앞에서는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제발 그들이 이승에 있던 한을 다 풀고 조용히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기를....!

 

 

 

 

아우슈비츠 총살대, 많은 수감자들이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어갔다.

 

 

 

 다른장소 같았으면 어떻게든 인증사진을 남기려고 애쓰려던 나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내가 나온 인증사진따위는 찍을 기분이 안났다. 자주 즐겨찍던 셀카조차도 찍기 싫었다. 그저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다니면서 그들을 추모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 다음 건물은 지하감옥이 있는 곳이었는데 조용히 그들이 고통속에서 살아왔던 공간과 그들이 처절하게 죽어갔던 그림들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총살대에서 하나하나씩 알몸으로 죽어갔던 수감자들

 

독일이 2차세계대전에서 패전 뒤 현상수배범이 된 독일 전범들

 

지하감옥 복도

 

 

 

 슬로바키아에서 중국 여자애랑 동행 중이었을 때, 그 여자애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투어 중에 일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귀띔했다. 그리고 3년 전에 P군이 귀띔해주길, 일본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패키지 상품으로 안 내놓는다고 했다. 그들 또한 독일군들이 유태인들에게 한 그 짓을 과거에 우리와 중국인들에게 똑같게 저질렀기 때문. 정말 분명한건, 약 70~100년전, 일본은 그 그림속에 묘사된 독일군들의 짓을 똑같이 자행했다. 근데 진짜 일본에게 열받는 것은, 그들은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지 않고 과거에 저지른 만행을 숨기는 데 급급할 뿐더러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뻔뻔하게 개소리를 하고 다니는 것이다. 전시품들을 하나씩 볼 때 마다 100년전의 치욕의 역사를 기억해두리라고 다짐했다.

 

 마지막 건물은 수감자들을 대량학살하던 가스실이었다. 가스실로 가기 전에 큰 문이 있었다. 당시 수감된 수감자들은 그 문을 거치지 않고선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고 했다. 그곳은 오직 죽음만이 수감자들을 반기던 헬 게이트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일한 출구, 이곳은 죽음으로 가는 헬 게이트였다.

 

 

 

  가스실 안은 침울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대부분 수감자들은 이곳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한쪽 방엔 그곳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한 수감자들을 기리는 작은 위령비와 꽃다발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옆방에는 화장터가 있었다. 아마 이곳엔 시신들을 흔적없이 신속하게 처리하는 데 사용되어졌을 것이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 겸 화장터

 

 

 

아우슈비츠 수용소 관람을 다 마치고 비르케나우(Birkenau,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로 가기 위해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3년 전에도 타봤지만 셔틀버스 이용료는 공짜였다.(나도 공짜가 좋아~~~~~^ㅡ^) 3년 만에 다시 찾은 비르케나우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3년 전의 비르케나우는 눈이 많이 덮여있어서 많은 것을 보지 못한 채 눈만 보고 왔는데 이 날의 비르케나우는 덮인 눈때문에 내가 못봤던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3년 전에는 어떤 할아버지랑 같이 동행했는데.... 지금 그 할아버지는 잘 계실까...?

 

 

 

 

 

 

 

 

 

 

 

 

'나치가 유럽의 각국에서 잡아온 약 150만의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 주로 유태인들을 학살한 이 장소는 영원히 절망의 눈물과 인류에게 고하는 경고가 될 것이다.'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가 모형을 전시해놓은 미니어처라면,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는 실제로 수감자들이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역시나 집이 몇채씩이나 늘어져있었고 내부는 마굿간을 개조한 모습이었다. 게중에는 부서진 건물들도 몇채 있었는데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개방되기 직전에 다급해진 독일군들이 흔적을 급히 지우려고 부셔놨다고 하는데 다 부수진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용소 안에는 철로가 있었는데 3년 전에는 두껍게 덮인 눈 때문에 보지 못했다.

 그 철로는 수감자들을 사로잡아오는데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고 한다. 게다가 아우슈비츠는 교통편이 용이하고 마을과 한참 떨어져 있었기에,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기에 딱 알맞은 장소였다고 한다. 수용소 저 끝편에는 수감자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있었고 묘비에는 이곳을 소개하는 각국 언어(폴란드어,영어,프랑스어,세르비아어,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 등)로 새겨져 있었다.

 

 얼추 오후 4시정도 되서야 관람이 다 끝났다. 침통한 발걸음으로 수용소를 나와서 조용히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로 돌아가는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다시 기차역으로 가려고 입구를 나와서 걸어가는데 길은 끝이 없어보였다. 약 20분정도 걸었건만 오슈비엥침 기차역은 도처히 찾을 수 없었다.(또 길치근성....ㅠㅠ) 안되겠다 싶어 다시 제1수용소로 돌아가서 크라쿠프로 가는 버스를 잡기로 했다. 버스가 올 때 까지 슬로바키아에서 사온 꼬마곰 젤리로 허기 및 갈증을 달래면서 약 3~40분을 대기탔다.(무슨 애도아니고 참~-_-ㅋ) 크라쿠프까지 가는 버스는 13zlt 들었다.(기차보다 3zlt 더 비싸군, 킁!(그래봐야 약 천원차이 ㅋㅋㅋㅋㅋㅋ))

 

 저녁은 맥도날드에서 해결하고 다시 호스텔로 돌아가는데 유키가 짐을 꾸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석은 지금 부다페스트로 떠날 거라고 했다.

 

 "나 이제 곧 부다페스트로 떠나"

 "아, 벌써 그렇게 됐구나"

 "응, 여행은 잘하고 있는거야?"

 "그럼, 나 오늘 아우슈비츠에 다녀왔는데 거기 정말 굉장했어, 근데 한편으론 끔찍했지"

 "그랬구나"

 "이대로 헤어지게 되니까 아쉽네, 나 취직하게 되면 여행갈 기회가 줄어들거야.ㅠ 그래도 도쿄는 가깝고 시차가 없으니까 휴가 때 갈 수 있을거야^^ 게다가 재작년에 우리형이랑 짬내서 한번 같이 왔던 곳이니까 ㅋ"

 "아, 그때 도쿄에 놀러왔었구나!"

 "응, 그러니까 한번 더 도쿄에 들르게 되면 바로 너한테 연락할게!"

 "그래! 알았어!"

 "아참, 잠깐 기다려봐!"

 "이건 친구가 된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야"

 "고마워, 잘 가질게!"

 "헝가리로 조심히 잘 가고 종종 또 연락하자고!"

 "알았어!ㅋㅋ"

 

 아우슈비츠에 있었을 때 일본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했지만 유키를 보니 금세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사라졌고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렷다! 근데 유키 이녀석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다녀왔을까? 나는 그녀석이 아우슈비츠에 다녀온 양심있는 일본인이길 바라고 있었다.

 

 잠시 광장으로 나와서 바람을 쐬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광장에서 와이파이는 신호는 약했지만 가동이 되었다. 한국에는 태풍소식이 꽤 있었다. 과연 수원은 무사할까?

 

 3년 전에도 들렸던 곳이었지만 이날은 그들을 마음껏 추모할 수 있었고 역사의식 또한 다시 정립하게 됐다. 역사, 특히 국사 부문에서는 신물을 흘릴 정도로 싫다고 한 나였지만 일제에 점령당한 근대사 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두리라 다짐했다. 다시는 이러한 홀로코스트의 참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제는 지구의 모든 인류들이 서로 화합하고 도우는 평화만이 있기를....!

 

 

 ※ 소소한 팁

 

-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투어신청으로 갈 수 있고 혼자 단독으로 찾아갈 수 있다. 한국어 투어도 있다고 하니 잘 활용하자. 단독으로 찾아갔을 때 매점에서 한국어 가이드북을 구입하면 관람하는데 어려움이 없다.(가이드북: 5zlt)

 

-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크라쿠프 중앙역에서 버스나 기차로 갈 수 있다. 요금은 그닥 비싸진 않지만 편도만 대략 1시간 30분 소요된다. 기차역에서 내리면 빨리 걸어도 최소 30분이상 소요되니 가급적이면 버스를 이용하자.(기차: 10zlt, 버스: 13zlt)

 

- 원칙적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박물관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있다.(눈치껏 적당히 찍으면 된다.)

 

- 아우슈비츠에서 비르케나우(제2수용소)로 가는 셔틀버스는 무료로 운행되며 소요시간은 약 5~10분이다.